[05/17] 출산 후, 내 모습 일상소묘(日常小妙)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하루 24시간 온전히 육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나마 수유할 때 잠깐씩 돌려보던 미국 드라마도, 
TV 스크린이 영/유아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해롭다는 기사를 읽은 뒤론 미련없이 접어 버렸고, 한동안 버닝하던 하루키 소설들
영어 원서 읽기도 '1Q84' 초반 몇 페이지에서 멈춰선 채 두꺼운 책장에는소록 소록 먼지만 쌓여가는 중. 백일 즈음부터 하나 둘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산후탈모' 수준에 근접해 가고 있다. 거실, 안방, 침대, 화장실, 하다못해
아기 기저귀에도 기척없이 떨어져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이 참으로 심란하다. 종종 서진이 손에 들려있는 긴 머리카락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집어낼 때마다 마음이 참담해진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어로 말릴 때마다, 한 뭉치씩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손으로 모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에 울컥할 때도 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곤 하지만, 그렇지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기가 밤잠을 가장 길게 자는 새벽녘, 불면증으로 깨어있다 보니 낮에는 체력이 부쳐 휘청거리게 된다.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가, 어제 저녁 무렵에는 드디어 녹초가 되어버렸다. 유난히 분유 거부 투정이 심하던 날, 아이를 달래며
기저귀를 갈고 일어서려다 눈 앞이 핑 돌고 시야가 갑자기 깜깜해져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참 이상하지. 하루 종일 그렇게 피곤한데, 왜 또 잠은 오지 않는건지..       

[05/14] 파란 만장 분유 투쟁기 + 기타 등등, 일상소묘(日常小妙)

...

1.
지난주 목요일, 생후 104일째.
며칠째 계속된 서진이의 분유 거부와 짜증이 극에 달했다. 어떻게든 녀석의 작은 배를 채워주려는 내 애타는 맘도 몰라주고,
분유로 보충을 해 주려 할 때마다 자꾸만 뻗대며 뚱한 얼굴로 기저귀며 방수요 위로 소변이나 지리는 녀석이 종내엔 야속하고 미워짐.
그러면 안 되는데.. 아기에게 분유병을 물리는 내 손길도 점점 거칠어졌다. 강제로 먹이려 할수록, 입술을 죽어라 앙 다물고
그 동안 잘 먹던 모유까지 함께 거부해 버리는 고집 센 녀석.

결국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J 퇴근시간 즈음해서는 애써 먹이려던 분유병을 던져버리고, 거실에 아이를 눕혀놓은 채
담요 한 장 달랑 덮어두고 안방에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서 홀로 남겨져 배고픔과 서러움에 떠나가라 울어대는 아기 울음소리.
그리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흘러나오는 눈물. 최악이야. 난 최악이야.


2.
그날 밤, 친정 부모님이 출동하셨다. 나와 아이를 위해서, 모질게 마음먹고 이제 그만 젖을 말리고 분유로 갈아타라 설득하셨다.
어쩌면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어쩐지, 나는 죽어도 용납을 못하겠다. 모유가 저절로 줄어들면 또 몰라도,
좀 부족하나마 멀쩡히 나오는 걸 인위적으로 말리라니.. 마치 거세라도 당하는 듯, 본능적인 거부감이 휘몰아쳤다.
억울함도 컸다. 더도 말고 아이가 하루에 두 번만 분유를 먹어주면 나머지는 모유로 충당이 될텐데.. 딱 두 번이면 되는데.
스틸티며 두유를 이렇게나 많이 마시면서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다 헛수고라니.

그 사이에도 서진이는 배가 고파 울어대고, 이미 모유는 동이 난 상태고 (다시 충전되려면 최소 세 시간 이상은 걸린다)
도무지 아이를 볼 용기가 안 나 안방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거실에서는 엄마가 유모차에 앉은 손주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이런 내용.

- 서진아, 너만 분유 먹는 거 아냐. 이맘때 아가들은 다 먹는거야. 네 엄마가 주기 싫어서 쭈쭈 안주는 거 아니잖니.
  분유랑 쭈쭈랑 둘 다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만 먹어보자, 응?


침대에 드러누운 채 눈물을 닦으면서도, 엄마의 비굴한(..) 고집불통 손주 회유 시도를 들으면서 괜히 헛수고하신다 싶었다.
분유는 죽어도 싫다는 저 고집쟁이가 뭘 알겠어. 도대체 말귀를 알아 들어야 말이지. 

그런데, 유모차에 앉은 서진이
갑자기 칭얼거림을 뚝 멈추고, 할머니의 설명을 유심히 듣다가 결국 -못이기는 척- 분유를 180ml나 먹어주었다.
먹는 중간 중간- 암만 생각해도 억울한지 히잉 히잉 울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참고 다 먹어주었다.
잠결에 스리슬쩍 분유병을 밀어넣는 것도 완강히 거부하던 아이가 받아들인 건 -어쩌면 성급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간곡한 부탁과 양해 구하기. (..) 내가 쓰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백일 갓 넘은 아기가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3.
금요일, 생후 105일째.

서진이는 드디어 혼자 힘으로 뒤집기에 성공했다. 거실에 깔아놓은 뽀로로 매트 위에 아기를 눕혀놓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서 어영차 몸을 뒤집은 듯. 아기와 같이 엎드린 자세로 한껏 박수를 쳐 주다가, (엄청 뿌듯해하는 표정이라니)
슬슬 힘들어할 것 같아 되돌려 눕혀놨더니 갑자기 짜증을 부리면서 뭐라 뭐라 폭풍 옹알이, 눈치코치없는 엄마에게 화를 낸다. 
'내가 어떻게 뒤집은건데, 그걸 엄마가 망쳐놨어!!'

어쨌거나, 지난 며칠간 어떻게든 뒤집어 보려 낑낑 무던히도 애쓰더니만 -그러다 침대에서 뚝 떨어지기도 했었지-
드디어 성공했구나. 축하해, 까칠한 아들녀석. 
그리고 분유 보충시, 그냥 물리지 말고 반드시 조곤조곤 달래고 설득해야 고분고분 먹어준다. 아무래도 좋아. 이대로만 쭈욱 가준다면.  


4.
일요일, 생후 107일째.

J와 나, 둘이 달려들어도 아기 땡깡에는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진다. 
행여나 자기 혼자 두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TV나 컴퓨터를 본다던가,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는 꼭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훼방을 놓기도 함. 단, 등 따숩고 뱃 속이 든든하면 너그럽기가 태평양같다. 
이제, 백일 갓 넘긴 아기라고 그 앞에서 말도 함부로 못하겠구나. 전부 알아듣는다고 가정하고 조심 조심 말을 건네야지. 

+ 앞으로 100일 사진도 찍어야 하고, 치발기며 딸랑이 등 간단한 아기 장난감들도 하나 둘 사들일 예정이다.
   그나저나 며칠 새 갑자기 묵직해진 서진이 체중.. 더 이상은 한 손으로 안아들기도 벅찬 상황.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프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